[서울=뉴시스] 빌 프리셀. (사진 =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사무국 제공) 2025.09.2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수십년 전부터 써온 ‘미국 3대 재즈 기타리스트’라는 수식은 거들 뿐이다.
미국 재즈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빌 프리셀(Bill Frisell·74)은 상대적인 아닌 젊대값을 매겨야 하는 뮤지션이다. 미국 권위지 ‘뉴욕 타임스’는 그를 ‘고차원적인 음악을 겸손한 형식으로 풀어내는 예술가’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재즈엔 정답이 아닌 저마다 해답만이 존재한다는 걸 대변하는 듯하다.
프리셀은 20일 국내 언론과 서면 인터뷰에서 “지금도 재즈가 너무 흥미로워요.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요”라고 말했다.
50년 가까이 재즈 음악을 해왔지만 여전히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기분”이라고 설렜다. “놀라움과 가능성이 가득한 음악이죠. 그래서 저는 연주할 때마다 늘 놀라움을 느껴요. 서로에게 여전히 놀라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습니다. 그게 재즈를 낡지 않게, 늘 새롭게 만들어 주는 요소죠.”
프리셀이 베이스 토마스 모건, 드럼 루디 로이스턴과 함께 ‘빌 프리셀 트리오’로 내한공연하는 자리인 ‘2025 제22회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10월 17~19일 경기도 가평군 일대) 역시 재즈로 환기될 거라는 기대감이 드는 이유다.
프리셀이 내한공연하는 건 지난 2003년 10월 LG아트센터에서 첫 내한 공연한 이후 무려 22년 만이다.
그는 “22년 전이라니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됐군요”라고 돌아봤다. “세상 곳곳을 많이 여행하고 여러 장소를 보았지만, 항상 너무 짧게 머물렀어요. 한국에서는 콘서트 한 번만 하고 바로 다른 나라로 이동했던 걸로 기억해요.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고, 음식이 정말 훌륭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 살고 있는 집 근처에 한국 식당이 하나 있는데, 아내와 가끔 간다. 한국어로 음식명은 정확히 외우고 있지는 못하지만 갈비와 여러 생선 요리가 있다고 했다. “어떤 건 김에 싸 먹고, 어떤 건 바비큐 소스 같은 걸로 조리했고요. 김치도 정말 맛있었어요. 작은 접시에 여러 가지 반찬들이 나오는 것도 좋습니다.”
프리셀은 15~16세 무렵 재즈 기타리스트 웨스 몽고메리의 음악을 듣고 ‘이게 뭐지?’라는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며 재즈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몽고메리의 선율은 프리셀을 마일스 데이비스, 소니 롤린스, 델로니어스 몽크, 빌 에반스 등 수많은 재즈대가로 이끈 길이 됐다.
“그건 제게 엄청난 해방감이었습니다. 이 음악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느낌이었어요. 규칙이 있긴 하지만 반드시 따라야 할 건 아니고, 원하면 벗어날 수도 있죠. 상상력을 완전히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음악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도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재즈 자체가 즉, 기개가 있어서 얽매이거나 굽히지 않는다는 뜻의 ‘척당불기(倜儻不羈)’와 일맥상통한 이유다.
재즈의 자유로움을 이처럼 즐기는 프리셀은 컨트리, 블루스, 포크,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유려하게 넘나든다. 그럼에도 미니멀하면서도 명상적인 연주 스타일은 유지하고 있다. 팻 메시니, 존 스코필드 등과 함께 재즈 기타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고 평가 받는 이유다.
“사람들은 흔히 ‘컨트리’, ‘록’, ‘블루스’ 이렇게 장르를 나누려 하지만, 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한 덩어리예요. 마치 큰 수프나 숲처럼 모든 것이 한꺼번에 존재하죠. 그래서 연주할 때 저는 ‘이건 재즈다, 이건 록이다, 이건 클래식이다’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냥 제 목소리를 낼 뿐이에요. 음악은 그 순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나중에 사람들이 설명하려고 단어를 붙이는 것뿐이죠.”
즉 “음악 인생 전체를 되돌아보면, 어릴 적부터 들어온 모든 음악이 다 제 안에 들어와 있어요. 지금 제가 75세에 가까워졌으니, 그만큼 많은 것들이 쌓여 있다”는 것이다.
그가 청년기를 보낸 1950년대는 TV가 막 등장하던 시기였다. 어린 시절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프로그램들이 큰 영향을 줬고 나중에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 지미 헨드릭스까지 그의 안에 들어왔다.
몽고메리를 비롯 지미 헨드릭스, 세고비아, 로버트 존슨, 조지 해리슨, 짐 홀… 모두 같은 악기인 기타를 연주하지만 완전히 다른 소리를 낸다며 그게 기타의 놀라운 점이라고 특기했다. “연주하는 사람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긴다”는 얘기다.
[서울=뉴시스] 빌 프리셀 트리오. (사진 =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 사무국 제공) 2025.09.2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하지만 기타리스트만 프리셀에게 영감을 준 건 아니다. 샘 쿡이나 디온 워윅 같은 가수, 색소폰의 소니 롤린스, 트럼펫의 마일스 데이비스, 그리고 델로니어스 몽크 같은 이들의 음악도 기타로 흘러 들어올 수 있다고 여겼다.
프리셀의 아방가르드 음악에 빠져 현대음악의 최전선에 서게 된 이유 중 하나는 1978년께 벨기에로 떠났던 유학도 있다. 벨기에 유학 기간이 그에겐 큰 실험 기간으로 남아 있다.
“그 이전에는 뉴욕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사실 두려워서 쉽게 결정하지 못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몰랐고요. 그러던 중 제 친구가 저를 초대했어요. 저는 당시 보스턴에서 공부 중이었는데, 그 친구는 벨기에 출신이라 ‘벨기에로 와서 밴드를 만들자’고 제안했죠. 그래서 저는 1년 동안 벨기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는 제게 아주 특별했어요. 제가 알던 모든 것과 떨어져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놓였으니까요.”
그곳에서 밴드를 꾸려 매일 연습을 했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을 직접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기도 했다.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죠. 1년 동안 벨기에에 있다가, 그 뒤에 뉴욕으로 옮겼습니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프리셀은 또한 ECM, 블루노트 등 세계적인 레이블에서 명반들을 발매했다. 그래미 어워즈 후보에 오른 ‘오케스트라(Orchestras)’, ‘포(FOUR)’, ‘밸런타인(Valentine)’, ‘하모니(HARMONY)’ 등이 대표작이다.
담당, 수혜 경력도 화려하다. 재즈 앳 링컨 센터(Jazz at Lincoln Center)는 ‘루츠 오브 아메리카나(Roots of Americana)’ 시리즈를 맡겼고, ‘도리스 듀크 아티스트(Doris Duke Artist)’로 선정되기도 했다. 혁신적인 음악을 지원하는 ‘프레시그래스(FreshGrass)’의 첫 작곡 커미션 수혜자이자, 샌프란시스코 재즈 센터(SFJAZZ)의 개관 당시 상주 예술감독으로도 활약했다.
그럼에도 프리셀은 “요즘 젊은 연주자들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빨리 배우는 것 같다”고 놀랐다. “정보가 너무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가 어릴 땐 음반 하나를 찾으려면 가게를 몇 번이나 찾아가야 했고, 얻은 음반은 반복해서 들으며 배웠습니다. 지금은 클릭 몇 번이면 수많은 음악을 접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젊은 뮤지션들은 단순히 빠르게 배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요즘 젊은 연주자들은 음악의 더 깊은 차원, 즉 영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을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빠른 음표가 아니라, 음악의 힘과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재즈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계속 강하게 이어질 거예요.”
‘일렉트릭 기타’도 프리셀의 성과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 프리셀은 어릴 적에 ‘시카고 블루스’에 빠져 일렉트릭 기타에도 눈을 떴다. 시카고의 리듬 앤드 블루스는 블루스가 ‘전기 기타’를 만난 결과물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타는 늘 매혹적이었어요. 연주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그랬죠.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인데, 당시 밴드들이 막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였어요. 그 시절 서프 뮤직 같은 밴드들이 나오고, 기타 사진들을 보면 온갖 색깔의 펜더 기타들이 있었죠. 자동차, 로켓, 핫로드 같은 이미지와 뒤섞여서 등장하곤 했어요. 기타는 늘 제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단순히 멋있어 보였거든요. 전자기타가요. 지금도 여전히 기타의 모습, 그리고 손에 잡히는 그 느낌을 사랑합니다.”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기타 중에는 그가 음악을 처음 들었을 무렵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모델도 있다. 예를 들어 펜더 텔레캐스터다. 이 모델은 1950~1951년께 처음 나왔다. 프리셀과 나이와 같다. “그래서 마치 제 성장과 함께, 로큰롤의 탄생도 동시에 이뤄진 느낌이에요.”
그럼 처음 기타를 잡았을 때의 그 설렘이 지금도 남아 있을까. “네, 여전히 그 설렘을 느낍니다. 지금도 놀라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