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이 3월 8일 트럼프 백악관 복귀 후 처음으로 전화통화를 갖고 우크라이나 휴전 문제를 논의했다.
포린 에퍼어즈는 ‘우크라이나 협상은 새로운 얄타회담이 될 것인가’라는 전문가 분석을 싣고 강대국 권력정치, 세력권 정치의 부활이라고 진단했다.
두 강대국 지도자가 당사국인 우크라이나를 빼고 운명을 결정하려는 점에서 얄타 회담과 닮았다는 것이다.
다시 소환된 얄타 회담
트럼프와 푸틴이 15일 알래스카에서 만난다고 하자 미국 씽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은 8일 홈페이지에 3명의 전직 외교관과 안보 전문가 3명의 분석글을 실으면서 다시 얄타를 소환했다.
존 허스트 전 우크라이나 미국 대사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국들이 초대받지 못했다”며 “1945년 얄타 회담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는 얄타 회담은 “미국, 소련, 영국이 유럽 절반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했다.
얄타는 러시아가 2014년 2월 전격 점령한 크름반도의 남단에 있는 제정 러시아 황제의 여름별장 휴양지다.
이번 알래스카 회담에서는 얄타가 포함된 크름반도도 논의에 포함될 전망이다. 나아가 트럼프가 점령 10년이 넘은 이곳을 러시아에 넘겨주자고 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이 회담 장소로 지목한 얄타로 와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지은 곳으로 도청 장치가 가득한 리바디아궁에서 머물며 회담에 참가했다.
루즈벨트는 황금 양털의 전설이 담긴 이름인 극비 이동 ‘아르고호 작전’을 통해 10여일에 걸친 여정 후 회담에 참가했다.
루즈벨트는 장거리 여행과 회담 스트레스 등의 후유증도 한 요인으로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얄타 회담은 동유럽과 중국 만주 등 동북 지방을 스탈린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게 했다.
영국 처칠 수상은 7일 간의 회담 중 미-러 정상에 비해 발언권이 떨어져 대영 제국의 해가 기우는 것을 확인한 회담이기도 했다.
얄타회담은 나찌 독일을 제압하는데 많은 희생을 했고 이미 동구권을 석권하고 들어온 소련의 스탈린을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현실론도 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스탈린의 야심을 너무 소홀히 했다는 지적도 나오는 등 2차 대전 후의 냉전 질서 구도를 그리기 시작한 얄타 회담은 강대국 정치에 많은 군소 국가들의 목소리가 묻힌 대표적인 회담이었다.
얄타와 뮌헨 회담, 닮은 점과 다른 점
얄타 회담은 나찌 독일을 상대로 한 전승 연합국간의 세력 재분배 회담이었다.
반면 알래스카 회담은 2023년 2월 우크라이나로 침공해 온 뒤 동부 지역 일부를 점령한 상태에서 이뤄진다.
침공 국가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지가 초점인 점에서는 1938년 9월 30일 뮌헨 회담을 더 닮았다.
그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히틀러는 독일인의 ‘생존 공간(Lebensraum)’ 확보를 명분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 거주자가 다수 지역인 슈데텐란트 할양을 요구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 중에는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경우 턱밑까지 밀고 와 안보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동부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거나, 크름반도를 점령한 뒤 투표를 거쳐 합병을 공식화한 것도 히틀러의 슈데텐란드 할양 요구 명분과 일정 부분 데자뷰가 있다.
세계 대전의 발발을 피하고자 했던 영국 네임 체일벌린 수상은 뮌헨 회담을 열어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신생국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사자지만 회담에서 배제됐다.
이 부분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익숙한 모습이자 트럼프와 푸틴의 회담에서 다시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점은 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뮌헨 협정을 환영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체임벌린이 ‘유화 정책’의 대명사가 됐지만 처칠 같은 강경 목소리는 소수였다.
지금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반대한다. 푸틴이 회담에서 어느 정도의 양보를 요구할 지도 변수다.
젤렌스키의 최악은 ‘멜로스 대표’ 취급
한 때 러시아는 전황이 유리하자 우크라이나 3분론까지 세우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말이 3분론이지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넣으려는 것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혀 수용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러시아는 동부 4개주와 크름반도만으로 만족할 지도 관심이다.
전쟁을 마무리짓고 지구촌에 평화를 가져와 노벨평화상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트럼프가 섣부른 양보로 ‘제2의 뮌헨 회담’이 되는 것은 젤렌스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알래스카 회담에 젤렌스키가 초청돼 3자 회담이 이뤄질지 관심이다.
문제는 몇 명이 만나는지 보다 어떤 내용이 논의되고 결정되는 지다.
2월 28일 백악관에서 젤렌스키가 트럼프와 밴스 부통령에게 전세계 언론 앞에서 묵사발 당한 것은 ‘멜로스의 대화’를 연상시켰다.
역사는 되풀이 될 수 있다.
기원전 400여년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의 대표는 작은 섬 멜로스를 찾아가 “강자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약자는 해야 할 일을 한다”고 말했다.
스파르타 진영에 가까웠던 멜로스의 대표는 “우리는 중립을 지킬테니 용인해 달라”고 했지만 그야말로 ‘1’도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맞서는 멜로스를 멸망시키고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를 삼았다.
회담에 참가한 젤렌스키가 멜로스 대표같은 대접을 받게 되면 최악이다.
젤렌스키는 ‘안정보장 없이는 휴전협정 안된다’는 이승만 대통령이 6·25 전쟁 정전협정에서 고수했던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좀더 정교한 전략이 필요해 보인다.
협상은 상대가 있고 더욱이 트럼프는 이승만 대통령 당시의 트루먼이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는 다르다.
제정 러시아가 팔아 넘긴 알래스카
1867년 러시아는 미국에 720만 달러를 받고 알래스카를 매각했다. 동토의 땅이어서가 아니다.
19세기 러시아 영토 알래스카는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다. 수도 노보아르한겔스크(현 시트카)에서는 중국산 옷감과 차, 심지어 냉장고가 발명돼 미국 남부에서 필요로 했던 얼음까지도 거래됐다고 한다.
하지만 얄타 회담이 열렸던 크름반도에서의 전쟁,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크름 전쟁(1853∼6)을 치르느라 재정이 고갈됐고, 당시에는 적대국이었던 영국에게 알래스카가 넘어가게 놔두느니 ‘훈훈한 관계’였던 미국에 넘기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했다.
미국에서는 당시 이 땅을 사들인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이 국내적으로 큰 비난을 받은 것은 널리 알려졌다. ‘윌리엄 바보’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미국에 매각한지 얼마 안돼 금광이 발견돼 이른바 ‘클론다이크 골드 러시’가 시작됐다.
최근에는 전략적 지정학적 가치는 물론 희토류 자원이 다량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러시아가 제정 시절에는 캘리포니아까지 최전방 포스트를 설치한 적도 있었다.
가까이는 냉전 종식 후 실추된 구소련의 위상을 되살리고 멀리는 러시아 제국의 부할을 꿈꾸는 푸틴은 알래스카에서 여러 가지 구상을 할 것이다.
트럼프와 푸틴이 얄타, 뮌헨, 멜로스 어느 길을 가던 우크라이나에는 반갑지 않다는 것이 아쉬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