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이혜성은 지난달 30일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엄친딸'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평소에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산 적이 없어요. 그렇게 봐주시는 거는 너무 감사한데, 저도 어렸을 때부터 다른 엄친딸, 엄친아들과 비교당하며 열등감을 많이 느끼면서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 수식어가 붙는다는 게 좀 신기해요”라고 말했다. (사진=이혜성 제공) 2025.10.0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서울=뉴시스]전재경 기자 =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KBS 아나운서 합격. 방송인 이혜성의 이력서는 ‘엄친딸’의 정석과도 같다.
그런 그가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잠시의 방황 끝에 돌아온 곳은 다름 아닌 책의 세계다.
지난 6월 그는 유튜브 채널 ‘이혜성의 1% 북클럽’을 열었다. 책을 매개로 역사·철학·예술·심리 등 다양한 주제를 깊이 있게 풀어내며, 게스트와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지식 대화 공간이다.
‘1%’라는 이름 탓에 누군가는 엘리트주의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혜성이 말하는 1%에는 깊은 뜻이 숨어있다.
“대한민국에서 꾸준히 책을 읽고, 심지어 주변에 공유까지 하는 인구는 1% 정도 될 거라 생각했어요. 제 주위에도 100명 중에 책 진짜 좋아하고 많이 읽는 사람은 두세 명밖에 안 되고요. 제 채널이 그 1%의 사람들과 함께 시작해 앞으로 5%, 10%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어요.”
그가 품은 선한 비전에도, 세상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가 대세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마포구에서 만난 이혜성은 “진짜 걱정이 많았다”며 멋쩍게 웃었다.
“주변에선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데 그게 될까?’라며 다들 부정적이었죠. 저 역시 확신이 있었다기보다, 20대 때부터 읽어온 책들이 그냥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게 아까워 아카이빙(기록)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채널이 망하더라도 저에겐 의미가 있겠다 싶었죠.”
방황하던 ‘엄친딸’, 책에서 길을 찾다[서울=뉴시스] 수능을 치르던 당시 이혜성의 수험표. 이혜성은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높은 교육열로 힘들었던 학창시절을 회상하면서도 “엄마가 되게 섭섭해하실 수 있어요. '엄마가 너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줬는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라며 웃었다. (사진=이혜성 인스타그램) 2025.10.05.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엄친딸’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달리, 그는 스스로 “자존감이 높게 자라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가장 치열했던 입시 관문을 통과한 직후 찾아온 것은 성취감이 아닌 깊은 공허함이었다.
“어머니 교육열이 높으셔서 늘 ‘누구는 몇 점 맞았다더라’ 같은 말을 들으며 살아왔고, 칭찬을 많이 못 받고 자랐어요. 그래서 항상 누군가를 의식하며 살았고, 그게 쌓여 20대 때 더 크게 방황했어요. 되게 어두운 터널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폭식증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었고요. 친구들한테 ‘이런 것 때문에 마음이 너무 힘들어’라고 하면 ‘괜찮아질 거야’ 이런 공허한 위로를 많이 들었어요.”
그 막막한 시절,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책이었다. 책은 그가 왜 힘든지를 개인적, 사회적 맥락에서 차분히 분석해주었다.
“책은 문제의 원인을 짚어주고 해결책과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해줬어요. ‘지금 당장 다 해결할 순 없어도, 이런 방향으로 가다 보면 인생이 조금씩 풀릴 거야’라고 작가들이 말을 건네는 느낌이었죠. 방황할 때 책으로 위로를 많이 받았고, 든든한 길라잡이가 되어준 셈이에요.”
책에서 길을 찾았지만, 방송 생활은 또 다른 고민을 안겨주었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은 그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예능에선 책 이야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진지한 얘기를 하면 재미없다고 구박 받았어요. 타이밍을 잡고 말을 꺼내려 해도, 워낙 훌륭한 분들이 여기저기서 치고 들어오니까 위축되고, 제 역할을 찾지 못했어요. 반면 지식·교양 프로그램에서는 제 속도대로 천천히, 조금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도 되니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아, 이쪽이 나한테 조금 더 맞나 보다’ 생각했죠.”
[서울=뉴시스] 이혜성. (사진=KBS, 유튜브 채널 '혜성책빵' 캡처) 2025.10.05.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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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2021년부터 2년 가까이 ‘혜성책빵’이라는 채널을 운영하며 해답을 찾으려 분투했다. 처음에는 맛집 소개, 공부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지만, 유독 빵 먹방 영상의 조회수가 높게 나오자 채널은 점차 ‘빵튜브’로 변해갔다.
그는 “영상 봐주시는 분들이 소중한 시간을 쓰는데, 과연 내 콘텐츠가 유익한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고 털어놨다. “뭔가 남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결국 2023년에 채널을 접었어요. 한동안 ‘유튜브는 나랑 안 맞나 보다’ 생각했죠.”
그렇게 오랜 고민 끝에 ‘가치’라는 해답을 들고 다시 시작한 ‘1% 북클럽’은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프로젝트가 됐다.
이혜성은 “방송 생활 10년 차인데 지금처럼 바빴던 적이 없다”며 웃었다. 기획, 섭외, 대본 작성은 물론 영상 편집 과정까지 PD와 단둘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 “혼자 영상을 찍을 때 퀄리티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폐기하고 두세 번 다시 찍기도 해요.”
특히 게스트를 향한 정성은 ‘집요함’에 가깝다. “게스트로 책을 낸 분이 오시면, 그분의 저서가 서너 권이면 그걸 전부 다 읽어요. 노트북에 좋은 구절을 정리하고, 인터뷰 흐름을 노트에 손으로 써요.”
실제로 그가 기자에게 보여준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촘촘한 질문 흐름과 인용 문장이 정리돼 있어, 한눈에 봐도 치밀한 준비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이혜성은 “이 노트에 있는 걸 다 외운다”고 했다. “프롬프터가 없고, 대화 중에 대본을 쳐다보는 게 너무 민망해서요. 이 암기에 대한 부담감이 되게 큰 것 같아요.”
[서울=뉴시스] 아나운서 김재원(위부터)과 광고인 박웅현, 가수 한해가 '이혜성의 1% 북클럽'에 출연한 모습. (사진=유튜브 채널 '이혜성의 1% 북클럽' 캡처) 2025.10.05.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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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적인 성격 탓에 섭외도 힘들었다. “제가 성격이 ‘I(내향형)’라 친한 연예인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섭외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는 첫 게스트였던 가수 한해에게 보냈던 장문의 카톡을 재연하며 웃었다.
“‘오빠, 내가 이런 유튜브를 하는데 오빠가 가진 와인에 대한 지식을 우리 구독자분들께 들려주면 너무 좋지 않을까’라며 구구절절 문자를 보냈죠. 원래는 남에게 부탁하는 걸 정말 못 했는데, 이젠 거절당하는 것도 중요한 연습이라 생각해요. 문을 두드렸다가 거절당하면 마음이 쓰라리지만, 그 경험이 저를 단단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될 거라고 믿어요.”
이런 노력 덕분일까. 채널은 개설 3개월 만에 구독자 6만명을 넘기며 조용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구독자들은 “혜성 씨에게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는 댓글로 그를 응원한다. 이런 반응에 그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20대 내내 ‘나 도대체 뭐 해 먹고 살아야 되지?’ 이런 방황을 오래 했던 사람으로서, 저에게 맞는 일을 찾은 것 같다는 댓글이 너무 반갑고 좋더라고요. ‘나 지금 잘 가고 있나 보다’ 했어요.”
실패보다 두려운 건 안주하는 삶[서울=뉴시스] 이혜성은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힘든 순간마다 달리기를 통해 마음을 다스린다고 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습관이다. “하루키가 힘든 날일수록 자기 몸에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달리기를 한다는 게 너무 멋있었어요.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숙제를 주는 방식이잖아요.” (사진=유튜브 채널 '이혜성의 1% 북클럽' 캡처) 2025.10.05.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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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이 두렵지 않을까. 그는 “100만 유튜버가 즐비한 세계에서 구독자 수로 평가받고, 성장이 정체될까 봐 너무 두렵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하지만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더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제가 인생에서 제일 경계하는 게 안주거든요. 망해서 창피할 것 같다는 두려움보다, 여기서 안주하면 도태될 거라는 두려움이 훨씬 커요. 그래서 그 정도 두려움은 그냥 견뎌내고 가는 거죠.”
KBS 퇴사를 결심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안정적인 울타리보다 “상처 받고 아파하더라도 더 많이 부딪쳐 가며 성장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중에게 화려한 모습 이면의 치열한 노력을 보여주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백조가 물 위에서는 우아하지만, 물밑에선 엄청나게 발버둥 치잖아요. 저는 그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학교 다닐 때 놀면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좀 얄미웠거든요(웃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 했고, 할 수 있는 게 노력밖에 없어서 시간을 갈아 넣어 겨우 여기까지 왔어요. 그런 과정을 보여주는 게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인터뷰 내내 유려하게 말하던 이혜성에게 ‘인생 점수’를 묻자 그는 “와,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고민하더니 뜻밖에도 ’32점’이라고 답했다. 그저 겸손인가 싶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제가 지금 32살인데,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럼 이제 인생의 3분의 1쯤 온 거죠.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이가 들수록 제 점수는 계속 올라갈 거라는 거예요. 50대, 60대가 되면 50점, 60점이 되어 있겠죠?”
이혜성은 김사인 시인의 ‘공부’라는 시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떤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그래, 다 공부지’라는 마음으로 살면서 레벨업해 간다는 내용인데, 저도 그런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공부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