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이다솜 기자 = “캄보디아에서 한국인이 또 납치됐다.” 이 문장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올해만 해도 이미 수백 건의 납치·감금 피해가 보도됐다. 겉보기엔 갑작스러운 해외 범죄 급증처럼 보이지만 사실 ‘예고된 범죄’에 가깝다.
이미 2~3년 전부터 국내 언론과 캄보디아 대사관은 탐사보도와 제보, 외교부 보고 등을 통해 “캄보디아에 한국인 대상 범죄조직이 둥지를 틀었다”는 경고음을 울려왔다. 현지에 보이스피싱과 로맨스스캠을 중심으로 한 조직형 범죄 세력이 뿌리를 내렸고 이들이 돈을 빼앗거나 인력을 강제 노동에 투입하는 일이 빈번해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찰과 외교당국은 귀를 닫았다. 그 결과 수백 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부랴부랴 ‘대응 체계’를 손보겠다고 나섰다. 피해자들의 구조 요청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정작 이를 막아야 할 경찰과 외교당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외교부는 캄보디아 한국인 납치·감금 실태를 파악하고도 사실상 방치했다.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에만 330건이 넘는 한국인 실종 신고가 주캄보디아대사관에 접수됐다. 그러나 국정감사에서 외교부는 이 중 몇 명이 귀국했는지, 여전히 소재를 파악하지 못한 인원이 얼마인지조차 명확히 답하지 못했다. 일부 피해자는 사설 브로커나 현지 지인을 통해서야 겨우 구조됐다.
경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캄보디아 현지에서 한국인 대상 범죄가 확산되던 시점 경찰청은 ‘국제공조 강화’를 내세웠지만 실제 현장 대응 체계는 부재했다. ‘코리안 데스크(한인 전담 경찰관)’ 설치를 추진하며 수습에 나서도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외사 인력과 예산 부족을 이유로 구조적 대응을 미뤄온 게 경찰 스스로였다.
캄보디아 사태의 본질은 정부의 ‘정보 부족’이 아니라 정부의 무능과 의지 부족에 있다. 캄보디아 사태는 범죄 조직의 은밀한 소행이 아니라 범행이 드러난 형태로 진행돼 왔다. 피해자들은 주로 SNS(사회관계망서비스)나 구인 광고를 통해 유인돼 현지로 이동한 뒤 여권을 압수당하고 몸값을 요구받거나 노동을 강요당했다.
우리 외교·치안 시스템은 여전히 국내 중심적이다. 해외에서 자국민이 피해를 입는 사건은 특이 사례로 분류돼 사후 대응에 머물 뿐 상시 모니터링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해외 공관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사건이 발생해도 현지 경찰과의 공조 라인은 느슨하다. 외교부와 경찰청, 법무부 간의 정보 공유 체계도 분절돼 있다.
캄보디아는 현재 드러난 사례일 뿐일 수 있다. 태국, 필리핀, 라오스 등에서도 비슷한 수법의 한국인 대상 범죄 조직이 활개를 치고 있다. 만약 지금의 구조적 한계를 그대로 둔다면 ‘제2·제3의 캄보디아 납치 사건’은 또 다른 지역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
‘예고된 범죄’를 막지 못한 경찰과 외교당국은 결코 책임이 만만찮다. 그 무능에는 경고를 외면한 태도 그리고 시스템을 바꾸려 하지 않은 관성이 자리잡고 있다. 예고된 위험을 방치한 결과는 언제나 재앙을 야기한다. 초기 대응에 실패한 정부는 사태가 커진 뒤에야 대책 회의를 열고 가해자는 우리 국민 자녀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런 악순환을 반복해선 안 된다. 캄보디아에서의 참담한 교훈이 헛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외교당국과 경찰 등 정부의 책임 있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