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서울=뉴시스] 류인선 기자 = “개정 상법이 사모펀드가 잇단 가처분을 신청하는 빌미가 되면 기업의 정상적인 투자 결정은 마냥 미뤄질 수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민사 대법정에선 태광산업의 교환사채 발행을 놓고 적법성 공방이 뜨거웠다.
이 공방은 태광산업이 뷰티 분야를 신사업으로 삼고, 이 사업자금 3186억원 마련을 위해 자사주 27만주를 기초로 교환사채 발행을 추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태광산업의 2대주주인 사모펀드 트러스톤자산운용은 개정 상법 상 ‘주주 충실의무’ 때문에 이 교환사채가 발행되면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태광산업도 외부 변호사들을 동원해 트러스톤자산운용 주장에 맞불을 놓았다.
이날 법정에서 양측 쟁점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개정 상법에 담긴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이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가 “비합리적 의사 결정으로 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 태광산업 자사주를 담보로 한 교환사채 발행은 절대 허용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1주당 교환가액 117만원은 너무 저평가된 금액이라는 것이다.
반면 태광산업은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지배 주주와 일반 주주 사이에서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 집합적 이익을 존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특히 주주 사이 이해 상충 여지가 없는 신사업 추진 위한 교환사채 발행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태광산업과 트러스톤자산운용이 이처럼 날선 입장차를 보이는 이유는 개정 상법에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전에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여서 회사의 손해 여부를 따지면 됐는데, 이젠 그 대상이 ‘주주’로 확대되면서 정상적인 투자 결정에 의한 단기간의 주가 하락도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경제계는 이런 해석 차이로 향후 기업들의 주요주주인 사모펀드의 비슷한 소송이 급증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기업들이 장기 성장을 위해 신사업에 진출하고,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야 하는데, 개정 상법이 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태광산업의 2대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태광산업이 신사업을 위해 교환사채를 발행하는 것을 결사 반대하며, 지난 6월 첫번째 가처분을 제기했다. 이후 7월 국회에서 상법이 개정되자마자 사실상 같은 내용의 가처분을 또다시 제기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의 이 같은 잇단 가처분은 급기야 아직 개정 상법에 포함돼 있지도 않은 자사주 소각 의무화에 기반했다는 지적까지 들린다.
하지만 이미 진행된 2차 상법 개정에도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담기지 않았고, 3차 개정 논의에도 계속 제외될 수 있다.
때문에 트러스톤자산운용이 이를 근거로 태광산업이 교환사채 발행에 나섰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개정 상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을 낳는다.
이런 지적에 부담을 느꼈는지 트러스톤자산운용 측은 “사모펀드가 단기 차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대주주의 장기적 투자에 몽니를 부린다는 주장은 한물간 프레임이다”고 강조했다.
물론 태광산업이 지금까지 주주친화적이지 못했다는 주장은 일정부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트러스톤자산운용이 비슷한 가처분을 반복하며 멀쩡한 기업의 신사업 자금 마련을 방해하는 이유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사모펀드가 일정 지분을 보유한 기업들의 경우 이번 태광산업 사태의 결론을 예의 주시한다. 단순히 가처분에서 종결될 지, 실제 소송으로 이어져 법적 분쟁이 장기화할 지 아직 단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둘 중 어떤 경우라도 태광산업 입장에선 아까운 신사업 타이밍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번 트러스톤자산운용의 가처분 신청에 대해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 지 재계 전체가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