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2020년 올해의 장애인상 축하무대에서 송소희(오른쪽)씨와 함께 공연한 이지원씨 (사진=한국장애인개발원 제공) 2025.08.2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구무서 기자 = “민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세계에 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싶어요.”
지난 18일 뉴시스와 전화 인터뷰를 나눈 이지원(25)씨는 발달장애인 최초로 경기민요 전수자가 됐지만 여전히 민요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아리랑을 널리 알리겠다는 꿈도 갖고 있었다. 발달장애인인 이지원씨가 민요를 접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어머니인 곽진숙씨의 도움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지원씨는 출산예정일이 2주가 지나도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인 곽씨가 유도분만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이가 목에 탯줄을 감아 응급수술을 했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이지원씨는 심장질환과 입 천장이 열려있는 구개열을 갖고 태어났다.
그렇게 두 돌이 됐는데도 이지원씨는 걷지 못했다.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염색체 이상질환인 윌리엄스 증후군 판정을 받았다.
곽씨는 “의사선생님이 나를 보면서 지원이가 평생 낮은 지능으로 살 것이라고 말을 했다. 그때 앞이 깜깜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당시 의사는 뒤에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윌리엄스 증후군을 가진 아이들은 음악이나 미술에 소질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단 곽씨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방금은 평생 낮은 지능으로 산다고 하더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 그냥 나를 위로해주려고 하는 말인가보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목을 가누는 것부터 걷는 것까지 대부분의 성장 과정이 늦던 이지원씨는 음악 소리에는 유난히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창 울다가도 음악 소리가 들리면 울음을 그쳤다. 미술관을 가도 그림은 보지 않고 천장에서 나오는 조그만 음악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트를 가도 장난감보다는 마트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에 더 관심을 보였다.
민요를 접하게 된 건 7세 때였다. 장구를 배우던 엄마를 따라갔는데 장구 장단과 민요 가사를 엄마보다 더 빨리 외우는 것이었다. 곽씨는 “당시 선생님이 소리를 하면 잘 할 것 같다고 했는데, 그때 우리 아이가 뭔가를 잘한다는 얘길 들은 게 처음이었다”며 “그래서 고민 끝에 성악처럼 외국어가 없는 소리를 시작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판소리를 시작했지만 긴 가사를 외우고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 TV에서 송소희씨의 무대가 나왔는데 이지원씨가 곧잘 따라 불렀다. 그렇게 이지원씨는 민요를 배우게 됐다.
하지만 교육 과정은 쉽지 않았다. 선천성 장애인인 이지원씨가 장애등급을 받은 건 17살이다. 특수반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곽씨는 중학교까지는 특수반이 없는 학교를 보냈는데 예고 진학을 앞두고 상담을 한 교사는 “어머니의 욕심으로 예고를 보내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꾸짖었고 곽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곽씨는 “나한테 그렇게 얘기를 해준 사람은 처음이었는데 오히려 뭔가 모를 후련함을 느꼈다”며 “지금도 여러 사람들이 진학 문제로 연락이 오는데 저는 지원이가 초등학교 때로 돌아간다고 하면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을 보낼 것 같다”고 했다.
[서울=뉴시스] 발달장애인 최초 경기민요 전수자인 이지원씨 (사진=곽진숙씨 제공) 2025.08.22.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그렇게 적성을 발전시킨 이지원씨는 각종 대회에서 장관급 표창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2022년 국가무형유산 제57호 경기민요 전수자 시험에 합격했다. 발달장애인으로서는 최초였다. 지난해에는 발달장애인 최초로 국악교육대학원에 입학했고 현재는 공공기관 최초로 설립된 세종시교육청 장애인예술단에서 교육공무직인 예술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지원씨가 적성을 찾자 가족들의 삶도 달라졌다. 곽씨는 “어렸을 때는 주위의 시선이 무서워 놀이터에 가더라도 사람들이 없는 시간대에만 골라갔다. 학교나 학원에서 친구들이 장애인이라고 놀린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상처를 오롯이 다 받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 뿐이었다”며 “지금은 공연 섭외가 계속 들어오고 해외 공연도 다니고 있다. 지원이 덕분에 온 가족이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다.
곽씨는 “진로를 생각해서 소리를 한 건 아니었고 지원이가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그게 직업이 됐다”며 “다른 부모님들도 용기를 잃지 말고 아이를 잘 관찰해서 좋아하는 게 있으면 잘 접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많이 나와야 아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지원씨와의 인터뷰
-공연을 많이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해외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파리)패럴림픽에서도 공연을 했다.”
-패럴림픽에서 공연할 때 떨리지는 않았나.
“하나도 안 떨렸다.”
-국악계에 후배들도 많은데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열심히 하면 된다.”
-꿈이나 목표가 있나.
“민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세계에 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싶고 민요 명창도 되고 싶다.”
*이 기사는 한국장애인개발원과 공동 기획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