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현지 시간) 알래스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첫 대면 회담을 가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 및 안전보장 방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한반도 모델’이 거론되고 있다.
핵심은 한반도 비무장지대(DMZ)와 같은 완충지대를 설치하는 것이다.
핵심은 ‘한반도식 완충지대’ 설치
‘완충지대’ 설치 필요성은 러시아와 휴전 혹은 평화협정을 체결해도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으려면 다국적 군대를 주둔시켜 ‘인계철선(tripwire)’으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는 러시아가 극구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우회하면서 실제로는 ‘나토 협약 5조’에 따른 공동 대응 문구가 아닌 ‘실제 행동’으로 집단안보를 실현하는 방안이다.
1994년 부다페스트 각서의 트라우마도 작용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 주권과 안보를 보장받았다.
미국 영국 러시아가 각서를 맺었고 중국과 프랑스는 별도의 협약으로 합류해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이 모두 참가해 보증을 했다.
그렇지만 2014년 러시아가 감행한 크름반도 합병, 2022년 ‘특수 군사작전’ 이름 아래 전면 침공을 막는데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러시아는 ‘위반’ 당사국이었고 중국은 안보리 결의안에서 침략 반대도 아닌 기권을 했다.
서방 3국은 워낙 전격적으로 이뤄진 크름반도 합병 때는 손을 놓고 지켜보았다. 전면 침공 때는 무기지원을 하네 안하네, 방어용이네 공격용이네 하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4개주, 전체 영토의 20% 가량을 잘라 먹는 것을 막지 못했다.
부다페스트 각서 서명 5개국의 ‘주권과 안보 보장’ 약속은 공염불이 됐다.
중국은 이중 용도 물자 지원과 석유 구입 등으로 재정을 뒷받침해주는 등 간접 지원 의혹을 받고 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거나 긴장속 대치가 계속돼 미국과 러시아가 발이 묶이고 러시아의 대중 의존도가 높아지는 것이 내심 바라는 최선일 것이다.
마치 북한 정권이 무너지지 않아 중국이 순망치한(脣亡齒寒)하지 않도록 지정학적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만 하면 세습 독재정권하 피폐한 북한 민생은 사실상 별 관심없는 ‘한반도 현상유지’가 최선인 것과 유사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의 한반도 소환
우크라이나 전쟁은 초기부터 한반도, 6·25 전쟁과의 유사점이 거론됐다.
6·25는 냉전, 우크라이나 전쟁은 신냉전의 길목이라는 시기적인 유사점, 자유와 공산(러시아는 공산주의 체제는 아니지만) 체제의 지정학적 단층지대에서 발생한 지리적 요인도 유사했다.
침략을 당한 쪽이 침략국을 몰아내지 못하고 장기 교착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6·25를 닮을 수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난 3월 26일로 지속 기간 측면에서 6·25 전쟁의 1129일을 넘어섰다.
한반도는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채 장기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도 협정 체결이 끝이 아닐 수 있다.
외교 전문지 포린폴리시는 두 전쟁이 기원과 규모 측면에서 매우 다르지만 ‘새로운 세계 질서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측면에서 유사성이 높다고도 했다.
‘한반도 정전’과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안전보장과 러-우 협상 전개 과정을 보면 6·25 정전 협상과 유사한 점이 여럿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진행될 것에 대한 시사점도 적지 않다.
미국은 정전 협상에서 판문점에서는 공산측과 신경전을 벌이고, 내부적으로는 이승만 정권의 안전보장 요구 및 상호방위조약 체결 압박과 씨름했다.
트럼프가 푸틴을 상대하면서 젤렌스키나 유럽 국가들과 불협화음을 내는 것과 유사하다.
젤렌스키가 2월 말 백악관에서 전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참사’를 당하고 쫓겨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의 ‘에버레디 계획’에 의해 하야 위기까지 몰렸던 것이 오버랩됐다.
우크라이나 휴전 협상의 모델로 ‘다국적 군대가 주둔하는 완충지대’를 최선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분석했다.
이승만도 공산측과 무슨 협정을 맺든 한미방위조약과 그에 따른 미군의 주둔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봤다.
미군이 조약을 맺은 뒤 태평양을 건너가면 중공군 등 공산측은 압록강 하나만 건너 언제든 다시 내려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크래버플 계획’에 따라 미군이 고문단 등 500명만 남기고 1949년 6월 30일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간지 1년 후 6·25가 발발했다.
키신저가 파리에서 공산 북베트남측과 평화협상을 맺고 철수한 뒤 2년 후 공산화됐다. 키신저는 이 협상으로 노벨상을 받았으나 공동 수상자로 선정된 북베트남 대표 레눅토는 거절했다.
레눅토는 “아직 조국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고 거부 이유를 밝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신이 맺은 협상은 ‘평화’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어서 수상 거부가 ‘양심적’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6·25 전쟁 후 3년, 협상 시작 후 2년여 지루하게 이어지던 정전 협상이 타결된 데는 1953년 3월 스탈린의 사망도 한 변수로 꼽힌다.
올해 73세인 푸틴은 한 때는 근육질을 자랑하고 한 겨울에도 얼음 물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생몰 보다는 결단이 가장 큰 변수라는 점에서 스탈린과 비슷하다고 보면 전망은 매우 비관적이다.
그는 서방의 음모로 구소련이 해체되고 냉전 종식 이후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레반시즘(Lebanism·복수주의)에 빠져 있는데다 제정 러시아의 영광 재현까지 노리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알래스카 회담 후 발언에서 푸틴은 알래스카가 한 때 ‘러시아 아메리카’였다고 불렀다. 제정 말기 매각했으나 자신들의 영토였다는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가 언젠가 캘리포니아주에서 연설하게 되면 이곳에도 한 때는 제정 러시아의 관리가 파견됐었던 곳이었노라고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런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는 ‘3단계 오디세이아’ 한미 방위협정 체결
한반도가 전쟁 후 남북 대치와 긴장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룬 데는 상호방위조약이라는 안보 울타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점령한 동부 지역 영토를 넘겨줄 수 없다고 하지만 더 큰 관심은 영토를 일부 넘겨준 뒤 나머지 영토의 안보와 주권을 어떻게 지키는 지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승만은 정전 협상 과정에 불쑥 불쑥 북진을 주장해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지만 그것은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려는 협상 전략이기도 했다.
젤렌스키의 고군분투를 보면서 이승만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이 3단계의 난관을 극복한 것을 되새기게 한다.
조약 체결에 전혀 관심이 없던 미국을 협상에 나서게 한 것이 1단계다. 미국은 지금도 단독으로 상호방위조약(동맹 조약)을 맺은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상대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롤러코스터 같은 12차례의 협상을 벌인 것이 2단계였다.
한미 양국은 조약 체결 후 비준까지 받은 뒤에도 통상 의례적인 절차였던 비준서 교환에 10개월 가량이 걸렸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 점심을 취소하고 내쫓다시피 했지만 한미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과 백악관에서 회담하다가 방을 나가버렸다.
협상 내내 북진 통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이승만은 비준서 교환 직전까지도 한일 국교 정상화에 소극적인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 마지막 갈등의 불씨였다.
젤렌스키도 푸틴과의 협상은 물론 트럼프와도 어떤 오디세이아가 남아있을지 모를 일이다.
처칠은 ‘전쟁은 끝내기보다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지만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6·25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보여준다.
조지 오웰이 말했다는 “전쟁을 끝내는 가장 빠른 방법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