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은 우리나라 노동법제와 노동환경을 국제 기준에 맞추려는 ‘한 발짝’에 불과하다.
경영계와 일부 정치권에서는 “세계에 유례없는 위헌 법안”이라며 격한 반발을 쏟아내지만, ILO(국제노동기구) 권고와 주요 선진국 입법례를 대조해보면 실상은 전혀 다르다. 늦었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 상식의 회복이라는 점이 오히려 분명해진다. 노사 갈등을 완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 개선조차 하지 않는다면, 국제 무역 경쟁에서도 뒤처질 수 있다.사용자 정의 확대·손배 남용 금지 …사실은 글로벌 스탠다드제113차 국제노동기구 총회 전체 회의. ILO 제공노란봉투법의 첫 번째 핵심은 사용자 정의 확대다. 현행 노조법은 ‘근로계약을 체결한 자’만을 사용자로 본다. 이 때문에 하청노조가 원청에 단체교섭을 요구하면, 원청은 “우리는 사용자가 아니다”라며 거부하고, 법원도 하청노조의 파업을 불법으로 판단해 왔다.ILO 결사의자유위원회는 이런 구조를 수차례 문제 삼았다. 2008년에는 “원청에 단체교섭 인정을 요구하는 파업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못박았고, 2012년에는 “노동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할 권한이 있는 원청과의 교섭은 항상 가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또 “하청이 결사의 자유 보장 규정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정부는 이를 방지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2023년에도 ILO 전문가위원회는 “하청노동자의 단체행동권 실현에 장애가 되는 법적·실제적 장벽을 제거하라”고 재차 요청했다.이 기준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도 결코 이례적이지 않다. 미국의 ‘공동사용자(Joint-Employer)’ 법리, 일본 아사히방송 판결, 영국·프랑스의 ‘실질 지배력’ 기준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1940년대 NLRB(연방노동위원회) 판정에서 공동사용자 개념을 도입했고, 1964년 연방대법원 ‘그레이하운드’ 판결로 확립했다. 2015년 ‘브라우닝-페리스’ 판정에서는 간접적·유보적 지배도 인정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1995년 아사히방송 판결에서 원청이 하청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 사용자로 본다고 판시했다.우리 법원도 직접 계약이 없어도 교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기 시작했지만, 개별 사건에 대한 판례에 그쳤다. 법률로 명문화되지 않아 예측 가능성과 분쟁 예방 효과는 미흡했다. 노란봉투법 2조 개정안은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조건에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를 사용자로 본다고 규정했다. 국제 기준과 판례에 맞는 노사 간 사용자 정의를 정리해놓은 것 뿐이다.두 번째 축은 노조에 대한 무차별 손해배상·가압류 관행에 대한 제동이다. 한국에서는 파업이 불법으로 판단되면 사용자들이 노조뿐 아니라 개별 조합원, 심지어 단순 참가자까지 거액을 청구한다. 쌍용차 174억 원, 현대차 325억 원, 한국철도공사 646억 원 등이 대표 사례다. 그동안 법원은 ‘부진정연대책임’을 적용해 피고 전원이 전액을 부담하도록 하고, 사용자는 이를 노조 파괴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국제사회는 이런 관행을 오래전부터 비판해 왔다. 2017년 6월 ILO 이사회 보고서는 “파업은 본질적으로 업무에 지장을 주고 손해를 발생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하며, 이를 이유로 한 민사상 손배·가압류가 “파업권을 무력화하는 수단”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해 10월 유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규약위원회도 “쟁의행위 참가 노동자를 상대로 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며, 보복 조치 자제를 권고했다.주요 선진국은 조합원 개인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을 사실상 금기시한다. 2022년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영국, 일본, 미국 등에서는 개별 조합원에 대한 청구가 거의 없다.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더라도 노조 탄압을 우려해 자제하는 분위기다. 특히 일본은 괴롭힘 목적의 소송을 ‘소권 남용’으로 각하하고 있고, 미국은 ‘전략적 봉쇄소송(SLAPP)’ 방지 법리로 소송 남용을 막는다.이번 3조 개정안은 경영계의 우려와 달리 ‘불법 행위에 대해 손배를 금지’하거나 ‘개인 손배’를 전면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노조 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선언과 함께, 불법 쟁의행위라도 무조건 연대책임을 묻지 않고 비율을 세밀히 따지도록 했다. 노란봉투법이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 국제적인 추세에 조금이라도 발을 맞추는 한 걸음일 뿐인 이유다.점점 커지는 국제사회 압박 “EU와 통상 마찰 우려도”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노란봉투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노조법 2·3조 개정 필요성은 2021년 4월 한국 정부가 ILO 핵심협약 87호(결사의 자유와 단결권 보호)와 98호(단결권과 단체교섭권)를 비준하면서 더 커졌다.헌법 제6조에 따라 이 협약들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비준국은 ILO의 강화된 이행감독을 받게 되는데, 한국은 4년 동안 끊임없이 개선 요청을 받아왔다.ILO 전문가위원회는 2023년과 2025년 두 차례 ‘직접요청(Direct Request)’을 보내, 노조법 2·3조 개정과 하청노동자 단체행동권 보장 등 23개 항목의 개선을 촉구했다. 국제무대에서 체면을 구긴 셈이다.인제대학교 법학과 박은정 교수는 “ILO 협약을 비준하면서 우리나라의 단체 교섭과 쟁의행위의 대상, 목적 범위에 대해 많이 개선이 필요하다라고 논의가 있었다”며 “단체교섭과 쟁의행위 범위가 지나치게 좁으면 노동자들은 민형사상 책임을 우려해 쟁의행위를 제한할 수밖에 없고, 이는 실질적인 노동 3권 보장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정흥준 교수는 “ILO는 제재권한은 없지만, 선진국 대열에 있는 한국이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국제회의에서 반복 거론하는 ‘망신주기 전략’을 쓴다”며 “국가 위상 타격뿐 아니라 일부 유럽 국가와의 통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실제로 노동 문제로 국제적 비판을 넘어 통상 마찰까지 빚을뻔한 전례가 이미 있다. 2019년 EU(유럽연합)은 한국이 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동기본권 보장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FTA 분쟁해결 절차에 돌입했다. 한국과 같은 ‘노동후진국’과 FTA를 유지할 수 없다고 압박했던 것이다. 노란봉투법은 ‘글로벌 스탠다드’ 최소 기준이자, 한국이 국제사회에 당당히 설 수 있는 토대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한국의 5대 교역상대인 EU는 내후년부터 ‘공급망 실사법’을 시행해 역내뿐 아니라 교역기업의 인권·환경 경영을 의무화할 예정이다. 한국이 노동 후진국 이미지를 벗지 못하면 통상 마찰이 다시 일어날 우려가 크다.정 교수는 “유럽은 원청이 하청의 법 준수와 인권 보장을 모니터링하고 이를 계약 조건으로 명문화하는데, 한국은 사내 하청조차 그런 관리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조법 2·3조 개정이 무산되면 노동조건 개선과 원청 책임 부재가 통상 마찰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다만 노란봉투법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정 교수는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교섭권 보장은 이번 개정에서 빠졌지만 국제적으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며 “이번 개정이 끝이 아니라, 더 넓은 범위의 노동자 보호를 포함한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