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국정기획위원회 앞에서 열린 민주노총 건설노조 폭염 실태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얼굴에 맺힌 땀을 닦고 있다. 연합뉴스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은 새로운 법이라기보다, 이미 법원 판례로 자리 잡은 원칙을 법률에 반영하는 작업에 가깝다. 일각에서 ‘공포’를 부추길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찬반 논쟁과 달리, 정작 학계의 평가는 간명하다. ‘새로운 법이 아니라, 판례와 현장의 갱신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노사 관계에 대한 판례가 하나씩 쌓이며 현실을 바꾸고 있었지만, 입법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그 사이 현장은 수년간 소송과 갈등을 반복해야만 했다. 현장 혼란을 막기 위해 정부가 노조법 개정안을 시급히 추진하는 이유다.대표적으로 사용자를 직접 계약 당사자로만 봐왔던 현행 노조법 2조 ‘사용자 정의’ 규정이 있다. 해당 조항은 우리 사회 곳곳에 뻔히 만연해 있는 원하청 관계를 ‘모르쇠’로 일관해온 조항으로 꼽힌다.아무리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고용·임금·노동안전 등 근로조건을 사실상 직접 결정하다시피 하더라도, 법률상 ‘계약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교섭 의무를 피할 수 있었다. 원청의 결단이 없으면 하청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은 바뀌지 않는데, 원청을 대상으로 하청 노동자들이 교섭 시도, 쟁의 행위를 벌이면 모두 불법으로 낙인 찍히고, 제대로 된 화해·조정장치도 없어 혼란만 커져갔다.판례 차곡차곡 쌓였다…’사용자’ 개념 현실에 맞게 고칠 때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왼쪽)이 서울 마포구 경총을 방문한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그래서 노란봉투법은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자’를 사용자 정의에 명확히 포함시켰다.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결정하는 원청이라면 사용자로서 하청 업체와 교섭을 해야한다는 당연한 원리다.이러한 원칙은 이미 판례에 담긴 지 오래다. 지난 2010년 대법원은 현대중공업 판결에서 계약 관계가 없는 원청이 하청노조 활동을 방해한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하며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자는 사용자”라고 못 박았다. 다만 당시만 해도 이 법리는 주로 원청이 하청 노조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지배·개입 사건에만 적용됐다.하지만 이 정의는 CJ대한통운 사건 판결에서 단체교섭의 대상인 사용자로까지 확장됐다. 하청 택배노조가 교섭을 요구하자 원청은 “계약 당사자가 아니다”라며 거부한 사건에 대해, 지난해 서울고법은 원심을 확인하며 “헌법이 보장하는 단체교섭권은 형식이 아니라 실질이 기준”이라며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했다. 근로계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해당 노동조건에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원청이라면 교섭 의무가 있다는 취지다.올해 현대제철·한화오션 판결은 이를 보다 구체화했다. 법원은 하청 노조의 교섭 대상별로 사용자성을 판단했다. 현대제철 사건에서는 ‘산업안전보건’에, 한화오션 사건에서는 성과급, 학자금, 노동안전에 대해서도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했다.이처럼 판례들이 이미 법리상 원청과 하청이 교섭하는 길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현행 법·제도는 현실을 무시해왔고, 이 때문에 노사는 소송으로 기나긴 세월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다. CJ대한통운 사건만 해도 1심 판결까지만 2년이 걸렸다. 노란봉투법이 새로운 현장의 기준을 반영해 궁극적으로는 노사 혼란을 줄이는 방책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박귀천 교수는 “중앙노동위원회가 먼저 현장을 반영해 하청-원청 교섭을 인정하는 판정을 내렸고, 이를 법원이 받아들인 흐름”이라며 “사내하청 구조에서는 하청회사가 원청에 절대적으로 종속돼 있어 원청과의 교섭이 없다면 실질적인 노동 환경 개선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 판결들”이라고 설명했다.인제대학교 법학과 박은정 교수는 “고용 관계가 다양해진 만큼 다양한 의미에서의 사용자 개념이 필요하게 되었다”며 “이번에 법안에서 사용자 개념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인’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서 확인하고자 한 것”이라고 풀이했다.이와 함께 개정안은 2조 ‘노동쟁의’ 정의에 ‘사업경영상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를 포함시켰다. 그동안 노동자들의 생존이 달린 정리해고, 공장 이전 등도 지금까지는 ‘경영 사항’으로 분류돼 교섭·쟁의 대상에서 배제됐지만, 이번에 범위를 확장 시킨 것이다. 이 또한 현장에는 이미 존재했지만 무시돼 왔던 현상을 법제화 시킨 것에 불과하다.2009년 쌍용차 사태가 대표적이다.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선 평택공장 점거 파업은 처음부터 불법으로 규정됐다. 정리해고가 노동쟁의가 허용되는 사유에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 합법 파업이 불가능한 가운데 사측과 정부는 거액의 손배·가압류를 청구했고, 노동계는 이를 “현대판 고문”이라 불렀다.법원은 점차 ‘근로조건’ 범위를 넓게 해석해왔다. 현대제철·한화오션 사건에서 성과급·학자금·산업안전이 근로조건으로 인정됐듯, 고용유지나 사업장 이전 같은 결정이야말로 노동자의 삶에 직결된다. 정부도 “근로조건 변경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결정만 쟁의대상”이라고 밝혔다.박귀천 교수는 “정리해고나 구조조정은 노동자 삶에 직결되지만, 우리 법상 고도의 경영상 결정으로 분류돼 교섭·파업이 불법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노동자에게 너무나 중요한데도 노조가 아무런 의사표현을 못하고, 의사표현을 하면 불법이 돼 버리는 영역으로 굳어져 왔다”고 지적했다.노조법 3조 판례 담았지만…’개인손배 제한’ 뚜렷한 한계도지난 1일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이춘석 위원장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거수 표결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정당한 노조 활동에 대해 무분별한 손해배상 청구를 금지하고, 개별 조합원에 대해 기여도를 고려해 배상 범위를 정하도록 한 노조법 3조 개정도 그간의 판례들을 담았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그동안 사용자가 쟁의에 나섰던 노동자들에게 제기해온 손배 청구액은 수십억에서 수백억 원에 달했다. 쌍용차 174억, KEC 306억, 한진중공업 158억, 현대차 325억, 철도공사 646억, MBC 195억 원이 대표적이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의 손배소를 제기하고, ‘노조에서 탈퇴만 하면 너는 소송대상에서 빼주겠다’며 회유하는 수법으로 사측이 ‘노조 파괴’에 나섰던 일도 드물지 않았다.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정될 3조 3항의 경우, 현대차 사건에서 2023년 대법원이 내세운 원칙을 반영했다. 대법원은 기존 ‘연대책임’ 원칙을 깨고 “조합원별 지위와 기여도를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개별 조합원에 대해 지위·역할·참여 정도·손해 기여도 등을 종합 고려해 배상 범위를 제한한다는 내용이 노조법 3조 개정안에 담긴 까닭이다.사용자의 불법행위에 대해 노조가 정당방위로 사용자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3조 2항 또한 2018년 CJ대한통운 사건에서 적립된 1심 판례에서 비롯됐다.당시 CJ대한통운이 분류작업을 거부한 택배노조 조합원을 대신해 직영 택배기사를 분류작업에 투입했다가, 노조가 이를 막아서자 16억에 가까운 금액을 청구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은 “배송 방해는 생계수단을 빼앗기는 데 대한 항의”라며 민법 761조 정당방위를 근거로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많은 사업장에서 ‘손배 폭탄’을 노조 파괴 수단으로 활용했던 점을 감안하면 노동계에서조차 이번 노란봉투법의 3조 개정이 충분하지 않다는 아쉬움이 나오기도 한다.헌법상 기본권을 행사하는 노조의 ‘쟁의행위’ 자체가 업무의 지장·손해를 입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이번 개정안에서는 개인에 대한 손해배상을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다. 사측이 노동자 개인을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며 압박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얘기다. ‘노조의 청구서’라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3조 개정의 내용에 노동계의 희망사항이 온전히 반영되지는 않은 것이다.시민단체 ‘손잡고'(손배가압류를잡자!손에손을 잡고) 윤지선 활동가는 이번 노란봉투법 개정 사항에 대해 “이미 법원에서 하고 있는 것을 반영한 것 뿐”이라며 “그럼에도 개인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계속되고 있어 법 개정을 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판례가 나올 때까지 소송을 버티자고 하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결국 이번 노조법 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위한 ‘현상 유지’ 조치에 불과하다는 평가다.박은정 교수는 “노란봉투법은 전혀 없었던 것을 규정한 게 아닌 지금까지 진행돼 왔던 방향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차원”이라며 “기존 판례가 노란봉투법을 통해서 다른 법원의 해석들까지도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