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재 PD
[서울=뉴시스] 최지윤 기자 = ‘공대에 미친 중국, 의대에 미친 한국.’ 열네 글자로 들여다 본 대한민국 인재 양성 민낯은 충격적이었다. 올해 본 가장 무서운 영상이자, 전 국민 필수 시청 영상으로 꼽혔다. 1부 중국 편은 공개 3주 만에 유튜브 조회수 100만회를 육박했고,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들은 국무회의 때 틀어 놓고 보고 독후감 10장씩 써야 한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KBS 1TV ‘다큐 인사이트-인재전쟁’이다. 그간 KBS는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공영방송이 맞느냐’ ‘수신료를 폐지해야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인재전쟁은 공영방송 수신료 가치를 보여줬다.
“입사 7년 차인데 이런 반응은 처음이다. 우리는 다큐멘터리 가치를 믿고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라서 해왔다. 화제를 불러일으키거나, 유명한 다큐를 만들기 위해 한다는 마음 자체가 없었다. 기성 미디어인 지상파 파이가 점점 줄어드는 환경 속 제작자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예전에 ‘인사이트 아시아-차마고도'(2007)를 만들었을 때 ‘정말 신났겠다’며 늘 부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방송을 해 자부심은 있었지만, 이런 반향을 몸으로 느껴 벅차고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제작하는 것 같다.”(정용재 PD)
정 PD는 1부 방송 후 베트남으로 휴가를 떠났다가 돌아왔다. 2부 한국 편을 연출한 신은주·이이백 PD도 비행기 티켓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27일 ‘인재전쟁 특집토론 생방송’을 편성할 만큼 파급력이 컸다. 정 PD는 “부장이 갑자기 전화 와 ‘빨리 들어와야겠다’ ‘9시 뉴스 출연과 긴급 토론 방송이 준비 돼 있다’고 하더라. 휴가에서 돌아온 경험은 처음”이라며 “고민할 여지도 없이 벅찼다. 한정된 방송 시간 안에서 우리가 어떤 해결책이나 대안을 찾기에는 부족했는데, 전문가들과 못다한 이야기를 해 의미있겠다 싶었다”고 털어놨다.
무엇보다 젊은 PD 3명이 만들어 반향을 일으킨 점이 의미있다. 그간 여러 미디어에서 이 주제를 다뤘지만, 신 PD는 “사회에 필요한 시점이 있구나 느꼈다”고 짚었다. “막내급보다 연차가 살짝 높다”며 “처음에 국장이 가이드라인을 잡아줬지만, 제작 과정에서 전혀 터치가 없었다. 우리 셋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갔다”고 돌아봤다.
이 PD는 “단순히 이공계 기피 때문이 아니라, 한국사회 여러 문제가 중첩 돼 나타난 현상이다. ‘정부한테 돈을 많이 써라’고만 할 수 없다”며 “매일 유튜브 댓글을 살펴보고 있는데, 1부는 전반적으로 충격, 공포라는 반응이 많았다. 2부는 한국 이야기라서 대부분 슬프다, 눈물 난다 등의 댓글이라서 안타까웠다. 제작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다. 20~30년간 이어진 고질적인 문제라서 대안을 말하는 건 섣부르다고 판단했다. 3부 토론을 통해 끊임없이 얘기하고 해결책이 나오길 바랐다”고 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는 옛말, ‘인벤티드 인 차이나'(Invented in China) 시대다. 국가 주도형 기술 천재 양성 시스템을 통해 키워낸 이들이 창조 중국을 이끌고 있다. 올해 1월 중국 인공지능 스타트업 딥시크가 저비용·고성능 AI 모델을 공개하자,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창업자 량원펑(梁文峰)은 중국 토종 공학 인재로, ‘딥시크 쇼크’를 불러 일으키며 AI 업계를 뒤흔들었다.
반면 한국은 20년째 의대 쏠림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초등 의대반이 전국구로 성행하고, 대치동 학부모 사이에선 아이에게 의대 머리가 있는지 확인하는 지능 검사가 필수 관문으로 통했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공대 합격자들이 의대 진학을 위해 재수, 삼수를 마다하지 않고 직장인마저 회사를 그만두고 의대 입시에 뛰어들었다.
인재전쟁은 4~6월 두달 간 촬영했으며, 기존 다큐 인사이트 제작 기간과 비슷한 편이다. 중국은 취재 요청을 받기 힘들어 불가능에 가까웠다. 6월 초까지 비자가 안 나왔고, 섭외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정 PD는 “중국에 여행으로라도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취재하러 들어가기 어려운 줄 몰랐다”며 “섭외 리스트를 보낸 순간, 해외 코디네이터도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어떤 분은 리스트를 보자마자 ‘못하겠다’며 포기했다”고 돌아봤다. “두달간 섭외하느라 시간을 다 썼다. 회의 하면 ‘일단 기다려보죠’ 말만 해 유행어가 됐다”며 “KBS가 가진 건 인적 자산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중국통 선배가 주한대사관과 연결해줬다. 모든 허가를 받고 취재한 건 KBS ‘슈퍼차이나'(2015) 이후 10년 만이다. KBS가 쌓아온 인적 리소스의 발현”이라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로 칭화대 야오치즈(姚期智) 교수를 꼽았다. 컴퓨터과학 분야 노벨상으로 불리는 튜링상 수상자로, 중국 관영매체를 제외하고 인터뷰한 미디어는 없었다. 정 PD는 “장난삼아 (섭외 리스트에) 넣었고,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에 메일 보내는 느낌이었다. 집요하게 괴롭혔다”면서 “5월 초 테니스를 치다가 광대뼈가 골절 돼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 있는데, 야오치즈 교수님이 인터뷰 해준다고 해 마치가 덜 깬 건가 싶었다”며 웃었다. “신기해서 인터뷰 끝나고 왜 해준 건지 물어봤는데, 비서실에서도 ‘모르겠다. 당황스럽다’고 하더라. KBS 아카이브에 원본 영상이 오래 남을 것”이라며 뿌듯해했다.
“중국에서 다들 공대를 지망하는 이유는 취업이 잘 되기 때문이다. 스타 과학자, 엔지니어, 창업자들이 많아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이 일차적이다. 중국인들은 인터뷰할 때 사자성어를 얘기하고 ‘삼국지’ 주인공 같다. 내 이익과 출세도 중요하지만 국가를 위해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는지 등과 관련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끼더라. 학생, 교수, 기업인 모두 그랬다. 카이스트 교수님이 ‘중국을 왕래하다 보면 40년 전 우리나라가 생각난다’고 하더라. 국위 선양하는 게 가문의 영광이었는데, 딱 그대를 보는 것 같았다.”(정용재 PD)
왼쪽부터 이이백, 신은주, 정용재 PD
국내 편 취재도 쉽지만은 않았다. 신 PD는 “의대에 미친 한국이라고 하면, 아무도 섭외에 응해주지 않는다. 다들 의대를 지원하지 않느냐”면서 “큰 틀에서 인재전쟁 팀이라고 하면 대치동에서도 응해줬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모자이크 없이 내보내 보람있다”고 설명했다.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불안한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찾는다’고 하더라”면서 “젊은 연세대 교수님은 ‘아내로부터 의사와 많이 비교를 당한다’고 했다. 연구하는 것도 좋지만, 부동산 등을 얘기하며 자신의 위치를 비교할 때 씁쓸했다”고 덧붙였다.
“댓글에 ‘의대에 미친 한국인데, 왜 의사가 안 나오냐’고 하더라. 취재·촬영을 했지만, 워낙 예민한 부분이다 보니 모자이크, 음성 변조를 원했다. 마지막까지 넣고 싶었지만, 마녀사냥이 될 수 있다고 해 뺐다. 카이스트를 다니다가 의대에 진학했는데, 더 나은 의대를 가기 위해 사수까지 한 분도 있다. 대치동에선 8~10년 정도까지 재수할 각오로 의대를 준비한다고 하더라. 끝끝내 촬영은 못했는데, 서울대를 나와 공기업 다니는 애 아빠가 작년 의대에 입학했다. 30대 중후반으로, ‘은퇴 후 삶에 불안감을 많이 느낀다’고 하더라. 선배들도 ‘관리사무소에서 일 할 것 같다’고 해 의대를 준비했다고 하는데, 한국 사회가 절망적이라고 느꼈다.”(신은주 PD)
이 PD는 “의대 가는 사람들을 악마화시키는 건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큐가 화제 돼 그런 선택을 하는 분들의 비난도 많지만, 그보다 긍정적인 공론장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입고 바랐다. “공대 박사, 석사하는 분들은 미래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교수들은 다른 맥락에서 불안감을 느끼고, 다들 해외로 나갈 생각을 하더라. 국내에서 계속 연구하는 일이 쉽지 않고, 연구가 세분화 될수록 자리가 없어서 힘들다”고 했다.
“카이스트 공경철 교수님 얘기를 듣고 뼈아팠다. 개인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건데 ‘공대 가는 건 소신, 의대 가는 건 나쁜 선택’이라고 몰아가는 건 옳지 않다고 하더라.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아이들은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는 걸 택할 수밖에 없다. 의사를 택하면 다른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우리 사회가 이런 선택지를 주고, ‘소신없이 의사를 선택하느냐’고 할 게 아니라 지친 아이들을 보듬어 줘야 하지 않느냐’고 해 공감됐다.”(이이백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