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유럽상공회의소가 내놓은 노란봉투법 입법 관련 성명서. 주한유럽상공회의소 홈페이지 캡처국내에 터 잡은 유럽기업들이 최근 ‘한국 시장 철수’까지 거론하며 ‘노란봉투법’ 입법에 반발하고 나섰다. 이는 그동안 EU(유럽연합)이 노조 활동권 보장을 명분 삼아, 우리 정부에 ILO(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을 압박해왔던 전례와는 전면 배치된다.
노동계에서는 ‘EU에서는 되고, 한국에선 안된다는 이중잣대’라는 비판이 나온다.31일 노동계와 관계부처에 따르면, 지난 2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한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에는 사용자 정의 확대, 노조 가입 확대, 노동쟁의 대상 확대, 노조활동 손해배상 제한 등이 담겼다.이에 주한유럽상공회의소(ECCK·유럽상의)는 입장문을 통해 노란봉투법에 대해 “사용자 정의가 모호하게 확대돼 외국인 투자기업이 형사처벌 리스크에 노출된다”며 “경영 활동 위축은 물론, 한국 시장 철수까지 검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EU는 ILO 권고 따르라 압박…한국 온 유럽 기업들은 “리스크”문제는 이들의 모국인 EU는 과거 한국 정부를 향해 “ILO 핵심협약 비준과 이를 위한 국내법 개정이 미진하다”며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압박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지난 2019년에는 ILO 핵심협약 비준 및 노동기본권의 실질적 보장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FTA 분쟁해결 절차에 돌입하며 한국을 상대로 무역 분쟁까지 일으켰다. 심지어 전문가 패널을 소집해 한국의 이행 상황을 정식 심리하기까지 했다.이처럼 EU가 한국의 노동권 보장 여부를 이유로 무역 분쟁까지 빚었던 이유는, 우선 보편적인 국제 규범인 노동권을 제한한 국가와 FTA를 맺고 무역하는 것 자체가 EU에 정치적인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해 ‘비용 절감’에 성공한 한국 기업을 유럽 기업들이 상대하기 불리한, 일종의 ‘불공정 무역’에 대한 불만으로도 볼 수 있다.당시 2021년 1월 발표된 전문가 패널 보고서는 “한국 정부의 협약 비준 노력은 FTA 위반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노조법의 실질적 개선 부족을 조목조목 지적한 바 있다. 특히 △’근로자’ 개념이 좁아 특수고용노동자(특고)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 △노조 임원의 자격을 조합원으로 제한한 점 △노조설립신고제도의 과도한 요건 등이 ILO 결사의 자유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결국 우리 정부는 2021년 4월 ILO 가입 30년 만에 ILO 핵심협약 29호, 87호, 98호를 비준해 EU와의 통상분쟁 위험을 피했다. 그럼에도 8개 ILO 핵심협약 중 7개만 비준한 상태여서 미비점이 남아 있다.그로부터 4년 뒤, 이번 노란봉투법 개정을 통해 앞선 EU의 지적을 보완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특히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하면 노조로 보지 않고 있는 노조법 2조 4호 라목 전체규정을 삭제해, 근로자가 아닌 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게 했다.또 노란봉투법은 ILO가 ‘파업 참가자에 대한 과도한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가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을 저해한다’고 꾸준히 지적해온 문제에 대한 일종의 개선책이 될 수 있다. 또 사용자 정의 확대 역시, ‘하청 구조의 남용이 노동 3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ILO의 경고에 대응하는 측면이 있다.지난 3월 공개된 ILO ‘협약·권고 적용 전문가위원회’의 직접요청에도 노조법 2조·3조 개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담긴 바 있다. 결국 EU와 ILO 가 지적한 문제 중 일부가 노란봉투법을 통해 법적으로 보완된 셈이다.그런데도 유럽상의는 “사용자 범위 확대가 모호하다”면서, 정작 우리나라가 EU 요구를 이행하는 순간 철수까지 거론하며 이행을 가로막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모양새다.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도 유럽상의의 ‘말 바꾸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김 장관은 이날 MBC 라디오에 출연해 “그 반발의 내용을 현재로서 잘 이해하지 못한다”며 “조속한 시일 내에 상공회의소에서 만나 우려를 듣고 설명드리고 싶다”고 말했다.김 장관은 또 “한-EU FTA에는 ‘지속가능발전’의 장이 있고, 거기에는 한국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도록 명시돼 있다”며 EU가 과거에는 노동기준 미달을 ‘임금 덤핑’으로 간주하며 비준을 요구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유럽이나 한국이나 같은 경영계?…유럽상의 “철수 논의는 없어”국제기준을 강조하며 한국을 압박했던 유럽상의지만, 이들의 행보는 한국 경영계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실제로 유럽상의는 주 52시간제 도입, 중대재해처벌법 도입 등 노동관계법이 개정되는 고비마다 한국 경영계와 공동 전선을 펼치며 반대 입장을 드러내왔다.
민주노총 류미경 국제국장은 “주한유럽상공회의소는 원래부터 이중적이었다”며 “한국에서 활동하는 유럽계 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국 진출 보험사 등은 과거에도 특고 노동자 권리 강화를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라고 반대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심지어 일각에서는 ‘유럽 기업이 한국에서 하는 행태가 한국 기업보다 더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유럽상의 회원사이기도 한 전동공구 업체 한국로버트보쉬사의 경우 과거 노조 활동 방해 사건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유럽상의는 논란이 커지자 ‘철수 가능성’ 발언과 관련해 실제 의도와 다르게 해석됐다고 해명했다.유럽상의 관계자는 CBS 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해당 표현은 백서 초안 중 하나의 문장에 불과하며 ‘최악의 시나리오’를 전제한 표현일 뿐”이라며 “현실적으로 철수를 논의한 바는 없다”고 밝혔다. 유럽상의는 매년 정부기관에 전달하는 정책 건의 백서를 준비 중이며, 해당 입장문은 그 백서에 포함될 예정이었던 안건 중 하나로 아직 확정된 입장이 아니라는 설명이다.또 이중잣대라는 비판에 대해 유럽상의는 “ILO 권고 이행에는 동의하지만, 노조법 2조가 모호하게 개정될 경우 법적 명확성과 사업 예측 가능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ILO 기준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사용자의 범위를 보다 명확히 규정해달라는 요청일 뿐”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