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연기 교육자 이바나 처벅(오른쪽)이 지난 21일 서울 중구 앰버서더 풀만에서 배우 정희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5. [email protected][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목표에 따라 이야기 전달력이 생깁니다. 진실한 것만이 정답이 아니죠.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여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위에서 듣고 본 것으로 미뤄 짐작하건대, 지금 한국 배우들이 가장 많이 읽고 참고하는 연기 이론서는 미국 연기 코치 겸 제작자 이바나 처벅(Ivana Chubbuck)의 ‘배우의 힘'(The Power of the Actor)이다. 이 이론서는 전 세계 20개 언어로 번역됐다. 개정판이 국내에서도 곧 출간된다.
로스앤젤레스(LA) 이바나 처벅 스튜디오 디렉터(Director)인 처벅은 배우, 캐스팅 디렉터,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특히 45년 동안 할리우드 배우들의 ‘처벅테크닉’ 액팅 코치(Acting Coach)를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할리 베리, 브래드 피트, 비욘세, 라이언 고슬링, 짐 캐리, 실베스터 스탈론, 제이크 질렌할, 샤를리즈 테론 등 유명 배우들이 그녀에게 연기를 배우거나 협업했다.
국내에서도 동시대 배우들이 가장 존경하는 연기 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미생’의 정 과장, ‘재벌집 막내아들’의 비서실장, 연극 ‘테베랜드’ 등을 통해 ‘신스틸러(scene stealer)’로 불리는 배우 정희태(51)도 그 중 한 명이다.
가끔 유명해서 인위적 존경이 제도화된 연기 선생들이 있지만, 처벅의 경우 배우들의 자발적 존경은 그의 이론과 실전에 힘입었다.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연기 교육자 이바나 처벅(오른쪽)이 지난 21일 서울 중구 앰버서더 풀만에서 배우 정희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5. [email protected]최근 연기 워크숍(22~23일 명보아트홀) 등을 위해 내한한 처벅을 정희태가 만나 인터뷰하는 현장을 통해 그녀의 이론이 어떤 위력을 품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책을 꼼꼼하게 읽어 온 정희태가 “할머니 구박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연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할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자, 처벅은 “당신이 배우가 된 이유도 이런 갈구, 욕망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일 것”이라고 답하며 ‘짧은 레슨’을 전한 것으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연기 테크닉에 ‘심리학’을 접목한 처벅은 ‘감정’보다는 ‘목적’이 이끄는 자신만의 테크닉을 개발했다. 그의 연기술은 배우의 트라우마, 감정의 아픔, 강박관념 등을 사용해 캐릭터가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를 돕는다.
다음은 정희태가 묻고 처벅이 답한 걸 정리했다. 통역은 처벅의 한국인 제자인 번역가 앨리스 문이 맡았다. 처벅은 자신의 인생 영화로 ‘기생충’을 꼽을 만큼 한국을 좋아한다고 했다.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정희태가 지난 21일 서울 중구 앰버서더 풀만에서 연기 교육자 이바나 처벅을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5. [email protected]-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목표가 있는 시기도 있지만 그냥 일상을 살아간다는 얘기도 많이 합니다.
“그냥 살아간다는 건 ‘삶이 지루하다’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삶에서 원하는 것이 없을 때는 그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무언가를 원할 때는 갑자기 리스크가 높아지면서 목표가 드러날 수 있죠. 만약에 총이 머리에 겨눠져 있다면, 살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집에 있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질 겁니다. 생존하고 싶은 이유가 커지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연기를 할 때는 ‘총이 머리에 겨눠져 있다’는 생각으로 ‘큰 리스크’를 갖고 해야 합니다. 예컨대 게임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과 시합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죠. 상대방이 잘하면 그 사람을 이겨야 한다는 목표가 생깁니다. 연기도 비슷해요.”
삶 속 여려움이나 장애물을 수용하기보다 영웅처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처벅의 방식이다. 즉 그녀의 테크닉은 배우들에게 이기는 방법을 전달한다.
심리 전문가이기도 한 처벅은 ‘배우 심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개인의 깊은 내면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보편적인 정서 상태보다 극단적인 상황과 관련 있는 특별한 경험을 매우 중시하는 셈이다.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연기 교육자 이바나 처벅(오른쪽)이 지난 21일 서울 중구 앰버서더 풀만에서 배우 정희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5. [email protected]배우가 이런 부정적인 심리 상태를 인지하는 걸 연기의 중요한 요소로 꼽는 처벅의 연기 이론은 ‘메소드 연기’ 창시자인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 정신분석을 중요하게 여긴 미국 연극이론가 겸 연출가 리 스트라스버그의 기존 이론과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캐릭터 분석은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일까요.
“연기는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해요. 땅을 잘 파서 벽을 단단히 세운 뒤 어떤 색깔을 칠할 지 고민해야 하죠. 분석은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현대성을 더할 지, 고전적인 분위기를 첨가할 지 결정할 수 있죠.”
-제가 출연한 연극 ‘테베랜드’는 러닝타임이 3시간 정도이고 대사도 많아서 12단계로 이뤄진 선생님의 연기 테크닉을 온전히 적용시키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연기 교육자 이바나 처벅(오른쪽)이 지난 21일 서울 중구 앰버서더 풀만에서 배우 정희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10.25. [email protected]”위대한 배우들은 그렇게 합니다. 상당수 배우들은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약을 원하죠. 하지만 위대함은 디테일에 있습니다. 그걸 캐내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그렇지 않고 뭉뚱그려 연기하면, 캐릭터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배우의 직업 정신은 위험을 감당하는 동시에 용감한 선택을 하는 것이에요. 두렵고 무서운 곳을 가는 게 연기 잘하는 비결이죠.”
-한국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해외 영화와 비교해서 한국 영화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좋은 작품이면 차이점이 없어요. 좋은 영화는 희망을 주는 데 목적이 있죠. 진실, 솔직함보다 더 중요한 건 ‘이해를 받았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거예요. 배우들은 관객들이 감정적인 롤러코스터 여정에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죠. 내 캐릭터를 응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캐릭터도 중요하지만 배우들이 먼저 궁금증을 갖는 것도 중요하죠. 내가 궁금증을 가지면, 다른 이들도 캐릭터와 작품을 궁금하게 여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