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이수정 기자 = “피고인. 주문 낭독 전에 피해자 유족에게 할 말 있으십니까” “저는 할 말 없고요”
‘일본도 살인사건’ 가해자의 아버지 백모(69)씨는 선고를 앞두고 ‘유족에게 할 말이 없느냐’는 판사의 말에 이같이 답했다. 백씨는 살인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아들에 대해 “피해자는 중국 스파이로서 한반도 전쟁을 일으키고자 했으므로 아들의 범행이 정당하다”는 등의 댓글을 여러 차례 작성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서울서부지법 형사9단독 김민정 판사는 지난달 27일 선고기일을 열고 백씨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김 판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겪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줬다”면서도 “내용들을 볼 때 비현실적이고 믿기 어려워 일반인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크지 않았으므로 피해자의 사회적·인격적 평가가 실질적으로 저하될 위험성은 낮았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김 판사는 이날 주문 낭독 전 이례적으로 유족을 앞으로 불러냈다. 그는 방청석 앞에 선 피해자의 부모를 지켜보다 어렵게 입을 뗐다. 김 판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믿기 어려운 끔찍한 사건으로 어린아이들은 아버지를, 아내는 평생의 반려자를, 부모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게 됐다”며 “판결의 내용이 엄벌을 탄원한 유족들의 마음을 풀어줄 만한 것은 아니겠지만, 유족들께도 깊이 공감하며 판결을 고심했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유족 측은 즉각 울분을 토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우리가 화가 나는 것은, 범죄를 저지른 저 부자(父子)는 사과 한마디 한 적이 없다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행유예를 준다는 것은 유족을 두 번 울리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재판부는 백씨에게 마지막 발언 기회를 부여했으나, 돌아온 것은 “할 말이 없다”는 짧은 답이었다.
백씨는 지난 5월 열린 공판기일에서도 유족에게 별다른 입장을 전하지 않았다. 약 7분간 이어진 최후변론에서 백씨는 자신이 댓글을 쓴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고, ‘왜 사과하지 않느냐’는 유족을 향해서는 “언론에 (일본도 살인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제가 댓글을 달고 한 것이 사과의 댓글”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사과 한마디 전하지 않았던 백씨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직후 조용히 법정을 떠났다. 유족은 집행유예를 선고한 재판부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죽어서 땅속에 묻혀 한 줌의 재가 된 것이 13개월”이라며 “이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소리쳤다.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죄는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명예훼손죄보다 형량이 낮다. 또 이번처럼 “내용이 비현실적이고 믿기 어려워 피해자의 사회적·인격적 평가가 실질적으로 훼손될 위험성이 낮다”고 판단될 경우 형량이 더 낮아질 수 있다. 때문에 백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도 피해자와 유족 관련 내용을 공개된 곳에 게시하지 않을 것을 특별 준수사항으로 정해 보호관찰을 명령한 재판부의 판결은 ‘적절한 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유족에 깊이 공감하며 판결을 고심했다”는 판결을 유족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법은 공정해야 하지만, 그것이 ‘기계적 공정’을 의미하진 않는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고 해서 ‘공정하지 못한 판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법 너머에 남겨진 유족의 삶은 여전히 1년 전 그날에 멈춰 서있게 됐다. 이유 없이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들에게는 또 한 번의 상처만 남았다.
“대한민국 법이 피해자를 어떻게 구제해주는 것이냐”는 피해자 아버지의 외침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