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루시드폴. (사진 = 안테나 제공) 2025.11.1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싱어송라이터 루시드폴(Lucid Fall·조윤석)은 이 시대의 참여시인이다.
서정적 멜로디, 시적인 노랫말, 음악 농부 같은 같은 키워드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반응할 법도 싶다. 하지만 그는 포크 모던록 밴드 ‘미선이’ 정규 1집 ‘드리프팅(Drifting)(1998) 시절부터 최근 발매한 정규 11집 ‘또 다른 곳’까지 주로 ‘민중 포크’의 심장으로 노래해왔다.
“다시 진달래 피네 /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봄을 타고 / 개같은 세상에 너무 정직하게 / 꽃이 피네 / 꽃이 지네 / 올해도”(미선이 ‘드리프팅’ 수록곡 ‘진달래 타이머’ 중)
“음- 나의 땅 / 음- 나의 집 / 음- 나의 형제는 모두 / 눈물 흘리다 말라 죽었네 // 모두가 죽어간 언덕에 / 열매를 맺은 별의 자손들 / 노래 부르며 기도를 하다 / 한 톨 남은 밀알마저 / 가져가 버렸네”(루시드폴 ‘또 다른 곳’ 수록곡 ‘늙은 올리브나무의 노래’ 중)
27년 간 간극에도 루시드폴의 사랑을 넘어선 사회에 대한 예리함은 뭉툭해지지 않았다. 그의 노래는 지극히 사적인 정서처럼 들리지만, 감정의 본질을 다루고 있는 터라 극진하게 보편적인 그 무엇이 된다. 루시드폴과 그의 노래가 부드럽다고 연약한 건 아니다.
[서울=뉴시스] 루시드폴. (사진 = 안테나 제공) 2025.11.1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최근 안테나에서 만난 루시드폴은 “노래하는 사람 입장에서 뭘 내가 노래할 건가 끊임없이 고민을 한다”고 말했다. “항상 제가 내리는 결론은 지금 나에게 가장 화두가 되는 걸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 앨범을 작업하는 3년 사이에 제게 가장 큰 화두는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지’였어요. 해마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비가 많이 내리고… 농사를 짓다 보니 이런 부분이 피부로 와 닿거든요. 전 세계적으로 혐오, 파시즘 같은 단어들도 10년 사이에 굉장히 많아졌어요. 그런 생각들이 가사에 스며들었습니다.”
루시드폴에게 우주는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나’라는 우주, 두 번째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사람들의 우주 그리고 세 번째는 나와 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우주다. 루시드폴은 이번 앨범에 물리적으로 조금 멀리 있는, 그래서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어 보이나 사실은 연결돼 있는 사람들에 대한 노래도 담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반영한 대표적인 곡이 ‘늙은 올리브 나무의 노래’다. 변박의 브리지, 독특한 조성 변화의 이 곡은 공습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위한 노래다. 사운드 텍스처의 긴장감은 이들의 참혹한 현실을 대변한다.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을 쫓아내기 위해 올리브나무를 뽑아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나무들은 우리로 치면 조상의 산소 같은 거래요. 그걸 지키기 위해 근처에 집을 짓고 사는데…. 제가 직접적으로 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래도 연대하고 싶다는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서 부르고 싶었어요. 사실 지금 시대의 많은 노래의 주제가 두 번째 우주에 몰려 있잖아요. 그 에너지가 저는 좀 과잉돼 있다고 보거든요. 노래를 만들 때 초점을 조금 바꾸고 싶었어요.”
디스토피아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구, 즉 대자연 어머니를 향한 간절히 호소인 ‘피에타’도 세 번째 우주에 속했다.
사실 루시드폴은 일찌감치 이 우주 영역에 속한 소재로 노래를 불러왔다. 방 안에 갇혀 하루 1달러를 받고 카펫을 만드는 중동의 소녀를 노래한, 정규 3집 ‘국경의 밤'(2007)에 실린 ‘사람이었네’가 대표적이다.
[서울=뉴시스] 루시드폴. (사진 = 안테나 제공) 2025.11.1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루시드폴 노래의 가장 큰 매력은 타국, 즉 ‘또 다른 곳’을 타자화하지 않는 음악적 타당성이다.
“참 어려운 얘기 같아요. 그러니까 정말로 삐딱하게 보자면 대중이 ‘네가 겪어봤어?’라고 물을 수 있잖아요. 음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첫 번째는 ‘내가 왜 이 노래를 쓰고 싶은지’예요. 팔레스타인 이슈가 제게 굉장히 중요해요. 왜 중요할까요? ‘내가 그곳에 산다면’ 혹은 ‘우리 가족이 거기에 살고 있다면’, 결국 이 부분은 공감의 영역이라고 보는데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치로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런데 그렇게 진심으로 만들어진 노래더라도, 완성도가 떨어질 수 있다. 차라리 노래를 안 만드는 것만 못한 결과물이 빚어지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루시드폴은 그럴 경우 그 곡을 버려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노래는 글이 아니고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에 ‘노래 힘’을 가지지 못하는 노래가 됐다고 판단하면 버려야 해요. 반면 최대치로 공감을 해서 타자에 대한 노래를 만들었고, 이게 들려짐으로써 조금이라도 음악인으로서, 음악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면 부르는 게 맞죠.”
그 노래의 버림 판단 기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루시드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에게 계속 묻는다고 했다. ‘음악적으로 부끄럽지 않은지’와 ‘메시지적인 측면에서 왜곡돼 지나치게 신파적이지 않은지’다. 이를 위해 최대한 감상적인 것을 최대한 경계하고 계속 게이트 키핑을 스스로 하려고 한다.
[서울=뉴시스] 루시드폴. (사진 = 안테나 제공) 2025.11.1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2009년 발표한 ‘레미제라블 파트 1, 2’에 이은 16년 만의 연작으로, 격정적인기타연주가 돋보이는 ‘레미제라블 파트 3’도 이런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는 곡이다. 세계 각지의 시민들이 저항하는 소리가 샘플링돼 있다. 1980년대 광주, 탄핵 정국을 불러온 2024년 서울 그리고 미국의 노 킹스 시위, 홍콩 민주화 운동, 미얀마 시위 등이다.
“샘플링 한 소리 중간에 자유라는 얘기가 계속 나오거든요. 사람들한테 제일 필요한 건 자유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누구에게도 간섭 받지 않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억압 받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테두리 안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 그런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단지 타국의 사람을 대상으로 삼은 노래가 아니라 또렷한 연대 의식으로, 타자화하지 않은 뮤지션의 노래는 이처럼 정당성이 있다. 그건 민족의 개념을 넘어선다.
타이틀곡 ‘꽃이 된 사람’은 비교적 단순한 구성의 사랑 노래다. 이번 앨범에 실린 9곡 중 가장 직구 같은 곡으로, 소속사 안테나 식구들과 함께 타이틀로 결정했다. 타이틀곡은 아니지만, 주제적으로 키워드에 가장 가까이 밀접해 있는 곡은 ‘등재대기’다. 좀 더 직접적으로 연대에 대해 노래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위한 정규 7집 ‘누군가를 위한,'(2015) 타이틀곡 ‘아직, 있다.’에 대한 10년 만의 답가다. “그 후에도 불행한 일들이 계속 반복이 됐잖아요. 조금 더 같이 아픔을 나누고, 서로 연대해서 이겨나갈 수 없을까? 서로에게 등대가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쓴 곡입니다.”
앨범엔 해외 실력파 유명 뮤지션들이 대거 힘을 실었다. 사운드적으로 다채로워진 이유다. 스페인 기타리스트 파우 피게레스(Pau Figueres), 아르헨티나 재즈 트리오 아카 세카 트리오(Aca Seca Trio)의 드러머 겸 퍼커셔니스트 마리아노 “티키” 칸테로(Mariano “Tiki” Cantero), 브라질 싱어송라이터 겸 멀티 연주자 시쿠 베르나르지스(Chico Bernardes), 스페인 출신 드러머 디닥 페르난데스(Dídak Fernández) 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평소 루시드폴이 좋아한 뮤지션들로, 어렵게 연락해 이번 앨범 작업에 대한 참여를 정중하게 부탁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곳’의 마스터링은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é), 리조(Lizzo) 등과의 협업을 비롯해 그래미 어워즈 수상에 빛나는 영화 ‘위대한 쇼맨’ OST의 마스터 엔지니어로 활약한 브라이언 루시(Brian Lucey)가 담당했다.
[서울=뉴시스] 루시드폴. (사진 = 안테나 제공) 2025.11.10.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음악적으로는 라틴, 유럽 분위기를 향하게 됐는데 어릴 때부터 루시드폴이 들어온 음악들 톺아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친구들이 메탈리카를 들을 때 보사노바를 들었던 중학생이었요. 친구들이 소방차, 박남정을 좋아할 때 전 (조동진이 이끈 음악공동체) 하나음악 뮤지션 노래를 들었던 아이였죠. 자라면서도 브라질 음악들 혹은 아르헨티나 음악들, 스페인 음악들, 포르투갈 음악들을 좋아했어요. 그게 제 음악 DNA에 새겨졌겠죠.”
음악이 무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루시드폴은 그래서 물성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어머니가 아직 CDP로 노래를 듣는다며, 아카이브에 유리한 CD를 소량으로 제작했다. 바이닐(LP)은 사용되지 않으면, 폐기되는 자투리 PVC들을 모아서 제작했다. “적어도 제가 앨범을 찍으면서 플라스틱을 더 소모하지는 않았지라는 마음이에요. 리사이클링 혹은 업사이클링 하는 개념에서 만든 앨범이죠. 이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무형이든 유형이든, 뮤지션과 노래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노래하는 것. 루시드폴과 그의 음악이 취하는 윤리적인 행위다.
루시드폴은 오는 28~30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ECC 영산극장에서 단독 공연 ‘2025 루시드폴 11집 발매 공연 ‘또 다른 곳”을 연다.